사례분석

발란

관리자 2026. 4. 25.
총 투자금
약 810억 원
투자 단계
시리즈C + CB
현재 상태
파산 선고
핵심 키워드 입점사(셀러) 대상 수백억 원 규모 정산금 미지급 사태(2025년 3월)로 신뢰 붕괴 및 자금경색. 엔데믹 이후 명품 소비 위축 및 티메프 사태로 업계 전반 신뢰 하락이 거래액 급감으로 이어짐. 과도한 쿠폰·마케팅 지출로 누적 적자 심화. 최대 채권자 실리콘투(채권 비중 24.6%)의 회생계획안 반대로 가결 요건 미달.

타임라인

2015: 설립
2021: 거래액 6,800억 원 달성, 급성장
2022.10: 시리즈C 250억 원 투자 유치 완료 (누적 735억 원)
2023: 자본잠식 진입
2025.03: 입점사 수백억 원 미정산 사태 발생, 기업회생 절차 신청
2025.04: 회생절차 개시, AAK 인수예정자 선정
2026.02.05: 관계인집회 회생계획안 동의율 35%로 부결 (가결요건 66.7% 미달)
2026.02.06: 법원 회생절차 폐지 결정 공고
2026.02.24: 서울회생법원 파산 선고

위기

① 엔데믹 전환 후 명품 온라인 수요 급감 및 시장 환경 변화 대응 실패
② 과도한 쿠폰 발행·마케팅비 지출로 인한 누적 적자 심화
③ 티메프 사태로 인한 이커머스 업계 전반 신뢰 하락 및 유동성 경색

일대기

프롤로그

발란(撥亂). ‘난을 평정한다’는 뜻의 한자어다. 최형록 대표는 이 이름에 자신의 포부를 담았다. 혼탁하고 불투명한 국내 명품 유통 시장의 비효율을 기술로 평정하겠다는 야망이었다. 2015년 창업 후 10년, 발란은 한때 트렌비·머스트잇과 함께 ‘국내 3대 온라인 명품 플랫폼’으로 군림했고, 기업가치는 최고 3,200억 원까지 치솟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만들어준 특수를 타고 2021년 연간 거래액 6,800억 원을 돌파했으며, 시리즈C까지 누적 735억 원의 외부 투자를 유치하며 업계의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2026년 2월 24일, 서울회생법원 회생15부는 발란에 파산을 선고했다. 설립 10년 만이었다. ‘난을 평정하겠다’던 기업은 결국 스스로 난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이 리포트는 그 10년의 궤적을 추적한다. 최형록 대표의 창업 동기에서부터, 빛나던 성장의 순간들, 분기점에서의 선택들, 그리고 결국 파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적어보려 한다.

호기로운 출발, 카탈로그 한 장의 남자

“공군 장교에서 창업가로”

최형록 대표는 공군 회계 장교 출신이다. 전역 후 그는 빌 게이츠의 저서 ‘생각의 속도’를 읽으며 유통 구조의 비효율 문제를 인지하게 됐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명품 시장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유럽 현지 부티크에서 판매되는 구찌, 프라다 가방이 한국 백화점 진열대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복잡한 유통 단계가 소비자 가격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를 ‘아비트라지(차익) 문제’라고 불렀다.

“100조 원 규모의 아시아 명품 패션 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가장 빨리 유럽 명품을 공급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의 ‘명품 가교’가 되고 싶습니다.”

출처: 이투데이, 최형록 발란 대표 인터뷰 (2017)

창업 이전에도 그는 사업 감각을 갈고닦았다. 대학 시절 방학마다 호빵이나 추러스를 파는 간이 점포를 운영했고, 전역 후에는 모은 돈으로 레스토랑을 차려 2년간 경영했다. 작은 사업들을 통해 익힌 ‘버티는 법’과 ‘생존하는 기술’이 훗날 발란 초기의 원동력이 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레스토랑이 목표 수익을 내자 최 대표는 다음 사업을 구상했고, 객단가가 높은 명품 유통이야말로 전자상거래에 가장 적합한 분야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카탈로그 한 장 들고 이탈리아로”

2015년 최 대표는 법인을 설립했다. 그리고 사업계획이 담긴 카탈로그 한 장만 달랑 들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유럽 명품 시장의 66%, 약 200조 원을 차지하는 1차 벤더인 부티크들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한 달간 1만 킬로미터를 차로 달리며 부티크를 방문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언어 장벽, 낯선 동양인 창업자에 대한 불신, 보수적인 명품 업계의 관행이 앞을 막았다.

그럼에도 최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패럴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초기 2년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2018년이 돼서야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해결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2019년부터 지금 발란의 체계를 갖추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 발란은 창업 후 250여 명의 고객을 직접 인터뷰하며 품질 관리, 배송, 스타일 등 서비스 전반을 재정비했다. 청라에 물류센터를 마련해 품질 관리(QC)를 안정화했고, 리얼 패킹 동영상, 챗봇 기반의 퍼스널 쇼퍼 서비스, 실시간 배송 알림 등을 구축했다.

초기 발란의 비즈니스 모델은 단순하지만 혁신적이었다. 유럽 현지 명품 부티크와 API로 연결해 현지 제품을 실시간으로 국내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B2B2C 마켓플레이스 구조였다. 고객은 발란 한 곳에서 주문과 결제, 배송, 반품, 수선까지 모든 서비스를 처리할 수 있었다. 발란은 ‘재고’를 직접 보유하지 않았고, 그만큼 자본 효율이 높은 구조였다. 이 모델은 해외의 파페치, 네타포르테, 육스 등과 유사했으나, 이를 아시아 시장에 맞게 현지화한 국내 유례없는 모델이었다.

코로나가 만들어준 무대, 승승장구의 시간

“시리즈A에서 시리즈C까지”

발란의 초기 투자 유치는 느리게 시작됐다. 2018년 글로벌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스파크랩과 명품 유통사 리앤한으로부터 약 20억 원 규모의 프리 시리즈A 투자를 받았다. 이어 2019년 12월, 메가인베스트먼트·SBI인베스트먼트·코오롱인베스트먼트 등 5개사로부터 10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하면서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최 대표는 이 시점을 가리켜 ‘소싱 역량과 IT 기술력을 바탕으로 명품 유통 구조를 선진화하는 계기’라고 표현했다.

전환점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외출이 어려워진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쏠렸고,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시중에 유동성이 넘치면서 명품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보복 소비’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시대였다. 발란은 이 물결을 정확히 탔다. 2021년 10월 한 달 거래액이 461억 원을 돌파하더니, 4분기 총 거래액이 전년 동기 대비 766% 급증해 2,000억 원을 기록했다. 같은 해 연간 거래액은 6,800억 원에 달했다.

성장에 투자가 따라왔다. 2021년 10월 발란은 325억 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 유치를 완료했다. 이어 2022년 10월 신한캐피탈·컴퍼니케이파트너스·다올인베스트먼트 등의 참여로 250억 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마무리하면서 누적 투자액은 735억 원에 달했다. 이 시점 발란의 기업가치는 약 3,000억 원으로 평가받았다.

“배우 김혜수와 함께, 브랜드 인지도의 절정”

발란이 대중에게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계기는 2021년 배우 김혜수를 내세운 ‘산지직송’ 캠페인이었다. ‘백화점보다 더 다양한 명품을 유럽 현지 400여 개 부티크, 1,500개 편집샵 상품에서 합리적 가격에 산지직송으로 만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명품을 원하지만 백화점의 문턱이 높게 느껴지는 30~50대 소비자들을 정확히 공략했다. 명품 커머스 앱 사용자·앱 설치자 1위를 기록하며 브랜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이 시기 최 대표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2021년 12월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년이면 글로벌 3위, 아시아 1위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소셜커머스 시장은 초기에 3사가 경쟁했지만 쿠팡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데카콘을 달성했고 나머지 2개사는 유니콘이 됐다. 이 시장도 해외자본과 스마트한 회사가 결합해서 살아남은 곳이 데카콘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속도 경쟁이다.”

출처: 이데일리, 최형록 발란 대표 인터뷰 (2021.12)

월 거래액 1,000억 원, 연간 거래액 1조 원. 최 대표가 2022년을 앞두고 제시한 목표였다. 겉으로 보이는 수치들은 그 목표가 실현 가능해 보이게 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호랑이 등에 탄 자의 선택들

“공격적 마케팅: 불가피한 선택인가, 치명적 오판인가”

발란의 성장 전략의 핵심은 공격적인 마케팅이었다. 시리즈B·C 투자금의 상당 부분은 광고와 쿠폰 발행에 투입됐다. 2022년 발란이 지출한 광고선전비는 177억 원에 달했다. 배우 김혜수를 앞세운 TV CF를 중심으로 대규모 마케팅을 집행한 것이다. 이 전략은 단기적으로 거래액 급증이라는 결과를 냈지만, 수익 구조를 갉아먹는 독이 됐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발란이 처한 구조적 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 비즈니스는 승자독식의 논리가 작동한다. 전환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하는 온라인 시장에서는 1위 서비스에 트래픽이 집중된다. 트렌비·머스트잇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발란에게 ‘성장 속도’는 생존의 문제였다. 누가 먼저 사용자를 끌어모아 네트워크 효과를 확보하느냐가 판가름을 내는 레이스였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투자를 받아 대규모 적자를 기반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모델이 힘을 얻었다. 쿠팡이 처음 시작했고 컬리가 이어받았다.”

출처: 발란 사례 보도자료 (업계 관계자 발언)

코로나 특수라는 비정상적 호황 속에서, 투자자들도 이 논리에 동의했다. 적자를 통한 성장이 당시의 지배적 방정식이었다. 발란 역시 그 논리를 따랐다. 그러나 ‘호랑이 등에 탄 자’는 내려올 수가 없다. 더 많은 쿠폰, 더 많은 광고를 통해 성장 지표를 유지해야만 다음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투자를 받아야 다음 쿠폰과 광고를 집행할 수 있었다.

“2023년 : 균열의 해”

2023년은 발란에게 가혹한 해였다. 엔데믹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온라인 명품 소비의 보복 소비 열기가 식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명품 브랜드들이 줄줄이 가격 인상에 나서면서 소비자들의 지갑도 닫혔다. 2023년 발란의 매출은 392억 원으로 전년(891억 원) 대비 56% 급감했다. 영업손실은 99억 원에 달했고, 자본총계는 -77억 원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설립 이래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한 발란에게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이 시기 발란은 마케팅비를 전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이며 수익성 개선에 나섰다. 그러나 명품 수요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마케팅비 감축은 거래액 하락으로 이어졌고, 거래액 하락은 투자 유치 협상력의 저하로 연결됐다. 쿠팡이 2024년 미국 명품 플랫폼 파페치를 인수하면서 발란의 시장 입지는 더욱 위협받게 됐다.

내부에서도 문제가 쌓였다. 2023년 유튜브 채널 ‘네고왕’ 행사에서 행사 직전 상품 가격을 올려 소비자들이 실제로는 더 비싼 가격에 구매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최 대표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행사 규모가 이렇게 커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신뢰는 흔들리고 있었다.

미정산 사태, 그리고 제2의 티메프 논란

“2025년 3월: 터진 뇌관”

2025년 2월 말, 발란은 화장품 회사 실리콘투로부터 75억 원의 투자(전환사채)를 유치했다. 이때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292억 원이었다. 2023년 초 3,200억 원에 달했던 기업가치가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수치였다. 협상력의 추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였다. 업계에서는 발란이 그만큼 자금 사정이 절박했음을 시사한다고 봤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인 2025년 3월 24일, 발란이 입점사(셀러)들에게 지급해야 할 판매대금을 정산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 발란이 내놓은 해명은 ‘과다 지급 오류 발견으로 인한 재정산 작업 중’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28일이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자 셀러들의 불안이 분노로 바뀌었다. 발란이 기업회생 절차를 준비 중이라는 정황이 판매자들에 의해 먼저 포착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3월 31일, 발란은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최 대표는 당일 입장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올 1분기 내 계획했던 투자 유치를 일부 진행했으나, 당초 예상과 달리 추가 자금 확보가 지연돼 단기적인 유동성 경색에 빠지게 됐다. 파트너 여러분의 상거래 채권을 안정적으로 변제하고,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다.”

출처: 최형록 발란 대표, 공식 입장문 (2025.03.31)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티메프 사태와 판박이’라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빠르게 비즈니스를 키운다는 명목 아래 투자금을 마케팅과 운영비에 투입해 손익구조를 악화시킨 다음, 유동성 위기로 후속 펀드레이징이 어려워지자 정산 주기를 미루고 파트너사의 돈으로 운영하다 결국 곳간이 비었다는 구조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발란의 상거래채권 규모는 4월 4일 기준 187억 9,000여 만 원이었으며, 이 중 미정산 대금은 176억 9,000여 만 원에 달했다.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나”

최 대표가 정산을 늦추고 버텼던 것은 자금을 조달해 상황을 수습하려는 시도였다. 이재용 회계사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발란의 문제는 명품 브랜드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준 상황에서 거품이 빠지니 높은 고정비와 낮은 기초체력이 문제가 되는 케이스다. 재무쟁이는 그런 의사결정을 하기 어렵다.”

출처: 이재용 회계사, 발란 사례 관련 인터뷰

발란은 명품 브랜드와의 협상력이 거의 없는 구조였다.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명품 브랜드였고, 물량을 통제하는 것도 브랜드였다. 플랫폼으로서 발란이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할인’이었다. 그 할인은 쿠폰과 마케팅비라는 비용으로 채워져야 했다. 코로나 특수가 사라진 이후, 이 구조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너무 오래 끌었다. 몇 년 전에는 정리됐어야 했다. 하지만 퇴출됐어야 할 회사나 준비되지 않은 회사들에게 대규모 투자금이 들어갔고 부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출처: 업계 관계자, 발란 사례 보도자료

마지막 승부수, 기업회생과 M&A

“마지막 승부수, 회생을 위한 필사의 노력”

기업회생 신청과 동시에 최 대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M&A를 병행 추진하겠다며 매각 주관사 선정에 나섰다. 그는 셀러들과의 직접 소통에도 나섰다. 2025년 4월 10일 발란 전체 거래액의 약 27%를 차지하는 상위 판매자 10여 명과 면담한 데 이어, 4월 15일에도 10여 명의 셀러들을 비공개로 만나 판매대금 미정산 사태를 사과하고 인수합병 계획과 판매 정상화 방안을 설명했다.

법원은 2025년 4월 회생절차를 공식 개시했다. 이어 발란은 패밀리오피스 투자사 아시아 어드바이저스 코리아(AAK)를 인수예정자로 선정하고 스토킹호스 계약을 체결했다. AAK는 설립 이후 160건 이상의 투자를 집행해온 투자사로, 인수 대금 22억 원을 완납했다. 인수 금액이 22억 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발란의 협상력이 얼마나 바닥으로 떨어졌는지를 보여줬다. 업계에서는 이 인수 조건 자체에 물음표를 달았다.

최 대표는 회생 절차 기간에도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했다. 필사의 노력이었다. 회생계획안에는 채권자들의 변제율을 높이기 위해 부인권(否認權) 행사를 통한 재원 추가 확보 방안도 포함됐다. 수정안을 통해 변제율을 15.5%까지 끌어올리는 안을 내놓으며 채권자 설득에 매달렸다.

“채권자의 벽”

그러나 최대 채권자인 실리콘투가 결정적 장벽이 됐다. 실리콘투는 발란 전체 채권의 24.6%를 보유한 최대 채권자였다. 발란 회생 신청 직전 75억 원을 투자했던 실리콘투는 투자 직후 기업이 회생 절차를 밟는 상황에 신뢰가 무너졌다. 2026년 2월 5일 서울회생법원에서 열린 관계인집회에서 발란의 회생계획안은 최종 동의율 35%를 기록하며 부결됐다. 가결 요건인 66.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2026년 2월 6일, 법원은 발란에 대한 회생절차 폐지를 공고했다. 2월 20일 최형록 대표는 법원에 견련파산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026년 2월 24일, 서울회생법원 회생15부는 발란에 파산을 선고했다.

파산 선고 이후 채권자들은 4월 3일까지 채권을 신고할 수 있었으며, 채권자 집회와 채권 조사 기일은 4월 16일로 잡혔다. 남아 있는 자산에서 공익채권(임금 미지급분, 파산 관련 비용, 조세 등)을 우선 변제한 뒤 남는 금액이 있어야 일반 채권자에게 배당이 이뤄지는 구조였다. 업계에서는 체불 임금 규모가 상당하고 공익채권이 많아 일반 채권자들의 실질 회수 금액은 극히 제한적일 것으로 봤다.

회생절차와 파산 직전, 취재진과의 전화 통화에서 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에게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망하는 것은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저희 때문에 병행 수입업체들이 피해를 받고 고통을 받는 게 두렵습니다. 저희가 망하면 이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플랫폼이 사라집니다.”

출처: 발란 사례 보도자료, 최형록 대표 전화 인터뷰

구조적 필연, 발란만의 실패였는가

“이커머스 생태계의 재편”

발란의 파산을 단순히 한 회사의 경영 실패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 배경에는 한국 이커머스 시장의 구조적 재편이라는 더 큰 흐름이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온라인 쇼핑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했고, 정부의 유동성 공급이 시장에 과잉 자금을 풀었다. 이 시기 쿠팡·컬리 등 선발 플랫폼들이 대규모 적자를 기반으로 한 외형 성장 모델을 확립했고, 발란을 비롯한 후발 플랫폼들도 이 방정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엔데믹 전환과 함께 환경이 급변했다. 독과점 현상이 심화되자 어중간한 포지션의 플랫폼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티메프·홈플러스·발란이 연속으로 위기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인터넷 비즈니스의 전환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하는 특성상, 1위 서비스에 대부분의 트래픽이 몰리는 구조에서 2~3위 플랫폼이 할 수 있는 차별화는 ‘할인’ 외에 거의 없었다.

특히 발란에게는 구조적 약점이 더 있었다. 쿠팡·네이버가 명품 시장에 본격 진입하고, 쿠팡이 파페치를 인수하면서 자본력과 물류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열세인 발란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발란(撥亂)’이란 이름을 내걸었지만, 이미 거인들이 진입한 전쟁터에서 발란의 협상력은 유명무실했다.

“회계사 출신 대표, 왜 재무 관리에 실패했나”

최형록 대표가 회계사 자격증 보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재무 관리에 실패한 사실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에 대해 이재용 회계사는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회계사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성향은 다를 수 있다. 사실 회계업무를 많이 하면 확실히 재무에 보수적으로 바뀌게 된다. 발란의 문제는 명품 브랜드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준 상황에서 거품이 빠지니 높은 고정비와 낮은 기초체력이 문제가 되는 케이스다.”

출처: 이재용 회계사, 발란 사례 관련 인터뷰

결국 발란의 실패는 특정 개인의 무능이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시대의 논리와, 더 빠르게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플랫폼 비즈니스의 생존 방정식이 결합해 만들어낸 구조적 비극에 가까웠다. 누구라도 그 호랑이 등에 탔다면 쉽게 내려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에필로그
‘발란이 남긴 것들’

“외형 성장의 함정”

발란의 10년은 외형 성장이 얼마나 허망한 지표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다. 거래액 6,800억 원, 기업가치 3,200억 원, 시리즈C까지 735억 원의 누적 투자. 숫자는 화려했지만 발란은 설립 이래 단 한 번도 영업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성장하면 수익성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플랫폼 비즈니스에서 외형 성장에만 집중하는 전략은 자금이 지속해서 공급될 때만 작동한다. 금리가 오르고 투자 심리가 냉각되는 순간, 적자 기반의 성장 모델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발란은 그 구조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줬다.

“파트너(셀러) 신뢰의 중요성”

발란의 붕괴를 촉발한 직접적 사건은 셀러 미정산 사태였다. 플랫폼 비즈니스에서 입점 파트너는 단순한 ‘거래처’가 아니라, 플랫폼이 존재하게 해주는 생태계의 근간이다. 정산의 신뢰성이 무너지는 순간, 셀러들은 이탈하고 소비자도 떠난다. 발란은 파트너와의 신뢰를 자금 운용의 도구로 쓰는 선택을 했고, 그것이 결정적 패착이 됐다.

“시장 변화 적응력의 부재”

코로나 특수로 성장한 발란은 엔데믹 이후의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명품 소비의 온라인 전환 트렌드가 꺾이는 시점에서도 외형 유지를 위해 쿠폰과 마케팅 지출을 이어갔다. 비용 구조의 조기 재설계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위기는 천천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깊어졌다.

“명품 브랜드와의 협상력 부재”

발란이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차별화된 가치는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그러나 그 가격을 통제하는 것은 발란이 아니라 명품 브랜드였다. 브랜드들이 가격을 인상하는 순간 발란의 가격 경쟁력은 사라졌다. ‘명품 가교’라는 포지셔닝이 실제로는 브랜드 파워 없이 유통 채널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였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시장에 남겨진 질문”

2026년 2월, 서울회생법원은 발란에 파산을 선고했다. 국내 온라인 명품 플랫폼 1세대의 종막이었다. 이 파산은 단순한 개별 기업의 실패를 넘어, 어떤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시장의 냉혹한 심판이었다.

이제 명품 플랫폼 시장에는 차별화와 건전성이 화두로 남았다. 적어도 쿠팡이 당장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발란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실패의 기록만이 아니다. 플랫폼 비즈니스의 생존 조건이 무엇인지, 파트너와의 신뢰가 왜 핵심 자산인지, 외형 성장의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일깨운 값비싼 교훈이다.

[참고자료]

이투데이, ‘추러스 팔던 대학생이 구찌·프라다 도매로 대박, 최형록 발란 대표’ (2017)

어패럴뉴스, ‘발란 최형록 대표 인터뷰’, 박해영 기자

이데일리, ‘최형록 발란 대표 「내년 거래액 1조원 목표…글로벌 톱3 자신」’ (2021.12)

플래텀, ‘럭셔리 플랫폼 발란, 100억원 규모 시리즈A 투자 유치’ (2019.12)

파이낸셜뉴스, ‘이커머스 격전 — 최형록·조용민·박경훈, 3인의 치열한 명품런’ (2022.02)

CEONEWS, ‘[WORST CEO] 최형록 발란 대표이사’ (2024.03)

ZDNet Korea, ‘발란, 결국 기업회생절차…국내 명품 플랫폼 빨간불’ (2025.03.31)

인더스트리뉴스, ‘최형록 대표 「발란은 여러분의 것」…판매자 「정산일정이나 내놔」’ (2025.03.28)

아주경제, ‘법정관리 명품 플랫폼 발란 최형록 대표, 주요 판매자들 연쇄 면담’ (2025.04.15)

헤럴드경제, ‘3천억짜리가 어쩌다…발란 결국 파산’ (2026.02.25)

이데일리, ‘발란, 결국 파산 수순…법원 회생안 강제인가 불허’ (2026.02.09)

비즈한국, ‘발란 결국 파산…임금·세금 우선 변제, 셀러들은 어쩌나’ (2026.02.27)

THE VC, 발란 기업정보 (https://thevc.kr/balaan)

뉴스와이어, ‘발란 250억원 규모 시리즈C 투자 유치 성공’ (2022.10.14)

블로터, ‘발란의 250억원 시리즈C 투자, 6개월 거쳐 완료된 사정’ (2023.04)

아웃스탠딩, 2024년을 끝으로 중단된 서비스들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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